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1993)
도계 박재완선생은 1903년 대구에서 출생하셨고 10세 전에 면우 곽종석(?宇 郭鍾錫)선생 연원(淵源)에 입문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이수(履修)하고 뜻한 바 있어, 19세에 중국에 건너 가 무송현(茂松縣) 탕해(湯海)의 왕보(王甫)선생의 문하에서 태을수(太乙數), 황극수(皇極數)와 명리학(命理學)을 연수(硏修)하셨다.
귀국 후에는 오대산, 속리산, 금강산 등지에서 학리연마에 정진하여 명리학의 태두(泰斗)의 자리에 이르렀다. 1948년에 대전에 정착하여 명리학의 궁극(窮極)을 고구(考究)하는 한편 후진양성에 진력하다가 1992년 9월 29일 90세를 일기로 별세(別世)하셨다. 저서(著書)로는 명리요강(命理要綱), 명리사전(命理辭典), 정전역해(正傳易解)등이 있다.
모든 사람은 각각 天文學的 記號로 쓰여진 身分證을 하나씩 갖고 있다. 다름아닌 태어난 年月日時가 그것이다. 年月日時는 별 태양 달 지구의 天文學的 座標다. 天體空間과 宇宙時間을 연계시킨 좌표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 이 天文學的 좌표가 어떠했는가 가 그 사람의 身分證이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의 일생이 지나갈 軌道는 태어난 年月日時가 결정한다는 생각이 있어 왔다. 태어난 年月日時를 네기둥(四柱)이라고 부른다.
이 네기둥은 각각 두 개의 글자로 표시하기 때문에 이를 합쳐서 여덟글자(八字)라고도 부른다. 이 여덟글자는 알고 보면 數字이다. 그래서 古代 동양인들은 天文에 따라 달력을 정하는 학문과 이 달력에 따라 사람의 運命이 결정된다는 假設에 입각한 일련의 學問을 「數學」이라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 한가지를 들 수 있다.
우리가 天干이라고 부르는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10을 한 週期로 하는 數字와 地支라고 부르는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를 한 週期로 하는 數字는 각각 陰陽五行상의 特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西洋의 數字는 數 그것만을 의미하는데 비해(그러나 희랍의 피타고라스 같은 이는 우주의 質料가 數字라고 생각하였고 각 숫자에 元素를 대응시키는 神秘主義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數字는 陰을 표시하는 數字, 陽을 표시하는 數字 水 火 金 木 土를 각기 표시하는 數字로 구성되어 있다. 出生時를 天干地支로 표시한 數字인 「여덟글자」의 陰陽五行은 그것끼리 서로 조화되기도 하고(相生)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한다(相剋). 여기서 그 사람 일생의 吉凶禍福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命理學의 假設이다. 이러한 吉凶禍福의 條件을 解明하는 것이 命理學이 考究하는 대상이다.
記者는 우리나라의 命理學의 傳統을 잇고 있는 최후의 大家라는 陶溪 朴在玩선생을 만나기에 앞서 그의 제자인 易門關主人으로부터 대강 위와 같은 命理學 얘기를 들었다. 易門關主人이 사이에 들어 1년이 넘는 설득 과정이 있은 다음 陶溪선생이 비로소 이 대담에 응하여 주었다.
隱退를 하였다고는 하나 記者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간간이 問卜을 오는 손님들이 있는 것을 보아 陶溪선생은 결코 손님을 거절하는 분은 아니다. 아마도 신문이나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대단히 어색하게 여기는 분이라서 記者와의 면담을 썩 마음 내켜 하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일행을 조용하면서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먼데서 오셨으니 우선 四柱부터 보지』이것이 그의 첫마디 였다. 記者는 生年月日時를 일러드렸다. 그는 올해 88세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돋보기도 쓰지 않았다. 가느다란 붓에 벼루로부터 먹을 찍어 기자의 四柱를 풀어 종이에 적는다.
「남의 기쁜 일은 기뻐하고, 남의 슬픈 일은 슬퍼한다」
이런 뜻의 글을 漢字로 적고는 記者의 四柱가 퍽이나 좋다고 한다. 四柱가 조금만 바뀌었더라면 長官자리 하나는 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자리는 못하더라도 지금 四柱가 더 깨끗하다고 귀띔해 준다. 記者는 큰 칭찬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四柱덕분에 비로소 그날 面談을 위한 최종 資格審査에 현장에서 합격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나중에 들게 되었다.
-선생님이 命理學을 공부하게 되신 동기와 命理學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좀 설명해 주십시오.
▲陶溪선생=
나는 본래 농촌에서 生長했습니다. 그래서 열아홉 살 나던 4월17일 까지는 그저 뜻도 모르면서 四書三經을 읽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牧師님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려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 중국으로 빠지게 되었어요. 거기서 五行을 아는 王甫라는 선생을 만나서 五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내가 五行을 배우겠다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네가 五行을 배운다 한들 옛날 范增(戰國時代 項羽를 도운 戰略家. 天文을 보고 劉邦이 天下를 통일할 인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려 기도했으나 失敗함)이만 못 할거고 그 후의 龐士元(中國三國時代 蜀漢의 謀臣 龐統)만큼 못할 텐데 배워서 뭣하겠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배워달라고 했지요. 그분으로부터 배운 것이 皇極數 太乙數 등의 數였습니다. 이런 수는 세상일을 환히 내다 볼 수 있다는 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워도 邵康節(宋나라 性理學者 詩人 天文易數의 大家 數理哲學者 皇極經世書를 저술)처럼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바꾸어 四柱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스무 살 때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중국의 四柱學說을 공부했습니다. 스물두 살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와서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의 잘되고 못 되는 것을 두루 살피며 경험을 하기 시작했어요.
-사람의 吉凶禍福을 헤아리는 일에 대해서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陶溪선생=
吉凶禍福은 生年月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꼭 알아야 할 일은 幻魂動覺 이 4가지 요인이 生年月日 이외에도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幻은 쉽게 말하자면 한 날 한시에 태어났더라도 짐승이냐 사람이냐에 따라 吉凶禍福은 사람한테만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사람의 吉凶禍福이 적용될 수가 없어요.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哲學의 主題가 됩니다.
魂은 祖上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前身은 아버지이고 그 앞의 전신은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쭈욱 이어지지요. 그래서 그 祖上이 좋은 일을 했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이 고약한 일만 많이 했는데 그 後孫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되겠지요.
그 다음이 動입니다. 한마디로 有國然後에 有民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倭政36년 동안 한국사람은 아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8?15해방이 뚝 떨어지니까 長官 되는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國會議員이 여기저기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動입니다. 이와 같이 어떤 세상에 태어나느냐가 중요하지요.
마지막이 覺입니다. 이것은 本人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본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生年月日時가 똑 같으면 똑 같은 人生을 살게되느냐하면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四柱는 51만8천4백 가지에 다른 四柱가 있습니다. 60가지 甲子에 12가지 달을 곱하고 거기에다 60가지 日辰을 곱하고 또다시 12가지 時間을 곱해서 얻은 숫자입니다.
세계에는 똑 같은 四柱를 타고 난 사람이 한 四柱마다 평균 1만 명쯤 있습니다. 세계인구 50억을 五行의 가짓수로 나누면 그렇게 되지요. 이와 같이 똑 같은 四柱를 타고나더라도 각자의 運命이 달라지는 것은 앞에서 말한 幻魂動覺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幻魂動覺을 빼어 놓고는 哲學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헛소리가 되기가 십상이지요. 幻魂動覺이 좋으면 四柱가 좀 부족하더라도 이것을 씻어 줄 것이고 幻魂動覺이 나쁘면 사주가 좀 좋더라도 복을 받는 것이 줄어듭니다.
-命理學의 學問的 내력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陶溪선생=
옛날 伏羲(중국 고대 三皇五帝 가운데 맨 첫王)가 河圖에서 方位와 身體部位를 표시하는 數體系를 얻고 周나라 文王이 洛書에서 點으로 표시하는 數體系를 만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합하여 陰陽五行의 체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周易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術客들이 흔히들 周易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周易은 진짜 학문이지요. 眞理와 善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易學입니다. 다만 周易에도 군데군데 陰陽五行에 따라 吉凶禍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의 術客들도 陰陽 두 글자와 五行을 말하고 있으니 그 근원은 周易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易學 그 자체는 아니지만 易學에서 分하여 나왔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命理學과 道學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陶溪선생=
道學을 내어버리고 觀相을 보아주어서도 四柱를 보아주어서도 醫術을 펴서도 안 됩니다. 道學을 떠난 五行은 僞經입니다. 예를 들어 四柱에 本妻를 버리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이롭다 하더라도 五行하는 사람은 그것이 道德에 벗어난 일일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술객의 心德에 달린 문제라고 하겠지요.
-韓國의 命理學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다고 보십니까.
▲陶溪선생=
지금 우리나라 命理學은 야단났습니다. 버렸어요. 6개월간 초급반, 1년간 고등반 이런 것으로는 命理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漢文에 無識은 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甲子年부터 지금까지 그러니까 67년간을 전공하고 있다고 보겠는데, 그래도 껍데기 밖에 모르고 핵심을 잡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그래도 좀 했다는 나 같은 사람도 오히려 부러지게 이야기 하지를 못합니다. 「글쎄요, 운이 좀 덜 좋으니까 분수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이런 정도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매우 야무진 소리를 더 합니다. 당장 교통사고를 당할 거라느니, 부부 이별할 수가 틀림 없다느니 말입니다.
術客들 사이에 서로 공부한 것을 두고 交歡하거나 하는 일도 없고 先後輩관계 같은 것도 없습니다. 징역쟁이들의 秩序만도 못하지요. 이런 얘기는 다 제쳐두고, 術書하는 사람들한테 꼭 얘기하여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시간 얘깁니다.
지금부터 80년 전 大韓帝國 시절에는 11시 땅 치면 그때부터 午時初였습니다. 日本人이 우리나라를 뺏은 후 庚戌年 7월 25일부터 植民地 정책을 펴느라고 우리나라 시간을 30分 앞당겨 東京표준시간을 쓰게 되었지요. 倭政 36년, 軍政3년, 그 다음에 大韓民國이 樹立되고도 이 시간을 그냥 쓰다가 李大統領 그 양반이 시간을 왜 日本시간으로 쓸까 보냐고 야단을 치는 바람에 甲午年 음력으로 2월17일에 가서 다시 30분을 늦추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우리나라 度數와 딱 맞게 되었지요. 辛丑年까지 그래서 옳은 시간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군사혁명이 나고 朴正熙 대통령시절 정부에서 그 해 음력 6월 29일 子時부터 다시 東京표준시간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11시가 지났다고 午時가 아닙니다.
이렇게 틀린 시간을 가지고야 五行이 맞을 수가 없지요. 게다가 서머타임을 실시한 적도 있어서 시간을 바로 잡기가 까다롭습니다. 四柱를 바로 보려면 첫째 시간부터 제대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선생님이 처음 命理學을 공부하시던 시절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陶溪선생=
제가 中國서 돌아와서 배운 선배는 서울 도염동 44번지에 살던 全在鶴이란 분입니다. 몸 전체가 새하얀 분이라서 全白人이라고도 불렀지요. 같이 서로 공부한 사람으로 權相龍, 全東津, 尹상돈 이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權相龍씨는 나보다 18세나 위였습니다만 나를 늘 접장, 접장하고 부르며 선생 대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지요. 全東津씨도 己丑생이라서 나 보다는 나이가 많았지요. 全東津씨는 나중에 平康郡守가 되었는데 郡守가 되다가 말고 6.25가 터지는 바람에 내려와서 다시 四柱를 보았지요.
學問이 아주 넉넉했지요. 윤상돈씨는 漢醫院이었는데 全東津씨한테 五行을 배운 사람입니다. 우리 넷 가운데 윤상돈씨가 제일 나았습니다. 나보다는 權相龍씨가 낫고 權相龍씨 보다는 全東津씨가 더 나았어요. 참 잘들 보았지요. 셋 다 나보다 먼저 죽었어요.
-선생님이 가르친 정통 命理學의 後繼者는 누가 있습니까.
▲陶溪선생=
(옆에 앉은 易門關主人을 가리키며)이 老石 밖에는 없어요. 73년부터 3년 동안 내 옆에서 書士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책을 쓰는 데도 도왔어요. 그 밖에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약 10년째 내 옆에서 지내고 있는 趙씨라는 사람이 있어요.
-선생님의 四柱보신 경험담 가운데서 몇 가지만 좀 얘기해주십시오.
(이 질문에 陶溪선생은 웃음만 머금고 좀체 대답이 없다. 듣기로는 우리나라 당대 名士들 가운데 陶溪선생에게 命運을 물어 본 사람은 대단히 많다고 했다. 易門關主人이 陶溪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記錄했던 몇 가지 逸話를 들려준다.
어느 날 아침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와서 四柱를 봐달라고 했다. 陶溪선생은 다음과 같은 玉樓夢의 주인공 양창국의 詩를 써 주었다.
斜雨江口 碧龍倒江
그 손님은 탄성을 지르며 어떻게 對處할지 그 方途를 물었다. 그는 土建業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날 부슬비 내리는 날씨에 그의 심부름을 가던 車가 錦江에 거꾸로 박혀 버렸던 것이다. 그 車는 푸른색 코로나였던 것이다.
빗긴비 내리는 江에푸른 龍이 넘어졌구나.
수년 전에 교통사고로 별세한 어떤 유명한 專門경영자의 그 때 身數는 「石氏問藥」으로 나왔다고 한다. 四言獨步라는 책에 나오는 이 句節의 뜻은 碑石을 새기게 된다는 뜻, 즉 死亡의 뜻이라고 한다. 이런 얘기가 자꾸 이어져 나가자 그때서야 陶溪선생이 이야기를 하나 더 꺼낸다.)
▲陶溪선생=
젊었을 때 한번은 江陵의 어떤 여관에 들었는데 나를 시험해 볼 생각으로 어떤 쌍둥이형제의 四柱를 누가 가지고 왔어요. 乙酉, 丙戌, 甲申, 辛未 이렇게 된 四柱였어요. 時間을 물어보니 쌍둥이 兄은 2시28분이고 동생은 2시31분에 태어 났다는 것이었어요.
支藏干에 보면 先童은 未 가운데 己土가 들어 있고 後童은 같은 未이지만 丁火가 들어 있거든요. 형과 아우는 둘 다 貴한 자리에 오르겠으나 형은 喪妻를 하고 無子孫하며 아우는 夫婦偕老하고 3兄弟를 두었다고 答해 줬지요. 젊은 때는 이렇게 까지도 맞힌 일이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兄의 이름은 李東昊라고 했고 아우는 李東旻이라고 둘 다 日本서 大學을 나오고 法官 노릇을 하는 분들이었어요.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합니다. 특별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시다면.
▲陶溪선생=
두 가지가 딱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나라가 할 일인데…. 하나는 前科者를 社會가 받아서 活用하는 方法을 꼭 硏究해서 실천해 달라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재능 있는 人材로 키워서 살도록 해줘야지요. 둘째는 교육제도를 고쳐서 우리나라 사람이면 男女를 불문하고 모두 원하는 大學을 나올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建物과 先生이 문제라고 할는지 모르나 건물은 굳이 커다란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닐 테고 대학을 졸업했으면 누구나 또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을 테니 先生도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대담=姜偉錫논설위원〉
도계 박재완이 남긴 일화 가운데 하나만 소개해 보자. 1979년 12월12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경복궁 일대에서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이름하여 12·12 사태. 이틀 후인 12월14일 이른 아침 대전에 살고 있던 박재완은 서울 경복궁 근처의 모 안가로 강제로 모셔져야만 했다. 신군부의 군인들에 의해 부랴부랴 대전에서 서울의 안가로 납치되다시피 온 것이다.
그 이유는 12·12 거사 주체세력들의 명리를 보아주기 위해서였다. 과연 거사는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인가. 평상시에야 합리와 이성에 바탕한 판단을 중시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수를 던질 때는 이성보다 초월적인 신의 섭리에 의존하게 마련인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신의 섭리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신의 섭리를 인수분해하면 사주팔자가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주팔자를 ‘신의 섭리’이자 ‘전생(前生)성적표’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12월14일이라면 12·12 불과 이틀 후다. 이틀 후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던 시점이다.
그 긴박한 시점에 신군부 주체들이 다른 일 제쳐두고 자신들의 사주팔자부터 보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평소 생각하기를, 칼을 숭상하는 군인들은 사주팔자와 같은 흐리멍텅한 미신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줄로만 알았다. 사주팔자는 다분히 문사적(文士的) 취향 아니던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군인들 역시 사주를 본다는 것은 의외였다. 사주팔자에는 문무의 구별이 없음을 깨달았다.
박재완이 감정한 신군부 주체들의 사주는 이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운이 좋다. 그러나 10년쯤 지나면 ‘재월령즉 위재이환’(財越嶺卽 爲災而還) 즉, 재(財)가 재(嶺)를 넘으면 재(災)가 되어 돌아온다.”
박재완은 1903년에 태어나 92년에 사망하였으니까 90세의 장수를 누렸다. 90세의 장수를 누렸기 때문에 도계는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고관대작과 기업가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사주를 보았다. 모모한 고위관료와 사업가 치고 그에게 사주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적중률이 높았다.
그가 남긴 저술은 ‘명리요강’(命理要綱)과 ‘명리사전’(命理辭典), 그의 사후(死後) 그의 제자들이 간행한 ‘명리실관’(命理實觀) 등이 있다. ‘명리요강’은 명리의 핵심 원리들을 요약한 책이고, ‘명리사전’은 그 원리들을 사례별로 풀어 놓은 책이다.
“2만명의 사주는 봐야 물리가 터진다”
특히 ‘명리사전’은 일본의 추명학자들이 일어로 번역본을 내자고 두 번이나 요청했던 명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재완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 명리의 노하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리실관’은 도계가 직접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사주를 본 임상기록이다. 이것을 보통 간명지(看命紙)라고 부른다. 수제자인 유충엽이 한문으로 된 간명지를 해석한 것이 ‘명리실관’이다.
사주에 대한 적중률도 적중률이지만 그의 인품도 남달랐다. 담백무욕(淡白無慾)해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명성이 높아지고 적중률이 높아질수록 돈에 욕심을 내기 쉬운 법인데 그는 돈 문제에 담백하였다고 전한다.
그만큼 단순한 술객의 차원이 아니라 내면 수양에도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1992년 임종을 맞이해서도 그냥 가지 않고 후학들에게 감동적인 일화를 하나 남겼다. 바로 자신이 죽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정해준 일이다.
죽음을 귀천(歸天)이라 했던가! 운명의 이치를 다루는 명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날짜도 정해져 있듯 죽는 날짜도 정해져 있다고 본다. 정해진 날짜에 하늘로 돌아가야만 끝맺음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귀천 날짜에 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모습도 과히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갈 때는 가야 한다. 이 이치를 박재완은 몸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그는 임종에 즈음해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귀천 날짜와 시간을 미리 예견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정해진 그 날짜와 시간에 자신이 하늘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절대로 링거 주사를 꽂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링거 주사를 맞으면 인위적으로 얼마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늘의 법도를 어긋나게 하는 일이 된다. 박재완은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 그 시간에 조용히 운명하였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명리학자의 죽음다웠다. 도인이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즈음하여 일생 동안 닦은 내공을 바탕으로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서비스이기도 하다. 초연한 죽음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도록 해주는 법문이다.
도계는 사주팔자를 통해 많은 중생들을 도와주었다. 사업에 부도나 자살하기 일보 직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몇년이 고비이니 이 고비만 넘으면 좋은 운이 찾아온다. 그때까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라”든가.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워 낳아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면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넘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라”고 위로하였다.
명리학자였던 도계는 그러한 고충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팔자소관으로 돌려라, 지금만 버티면 다음에 좋은 때가 온다, 기다려라’의 상담초식이었다. 엄청난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로 위로할 것인가. 그 해답은 주님의 섭리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미치거나 병들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도계를 찾아와 상담했던 사람들 중 이색적인 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이란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수험생들이었다. 고시에 여러번 낙방하다 보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고시원에서 시험준비만 하다 내 인생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연고로 고시생들이 사주팔자를 많이 연구한다. 낙방을 거듭하던 고시 수험생이 어느날 도계를 찾아와 물었다.
“저 아무래도 고시공부 집어치워야 할까 봐요.”“아니네, 이 사람아, 자네는 고시에 합격할 운이 있네, 한 2년만 더 참고 공부하면 그때 합격할 것이네,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소.”아닌 게 아니라 2년후 그 수험생은 고시에 합격하였다. 합격하고 나서 이 수험생은 사주팔자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의문을 품고 고시공부 하듯 명리학 서적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나서 쓴 책이 바로 ‘사주정설’(四柱精說)이라는 책이다. 고시 합격자가 핵심 원리만 뽑아 정리했기 때문에 보기에 일목요연하고 부피도 얇아 초입자가 공부하기에 좋은 책이다. ‘사주정설’의 저자는 백영관(白靈觀)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저자의 실명이 아닌 가명이다.
‘사주정설’을 집필할 때(1982년) 저자는 현직 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현직 검사가 실명으로 사주팔자 책을 저술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부득이 가명으로 책을 낸 것이다.
사주 공부는 첫째, 이론서를 섭렵하고 둘째, 실전 문제를 많이 풀고 셋째, 직관력을 갖춰야 한다. 직관력이란 영적인 힘을 가리킨다. 사주 내공의 완성단계는 직관력이다.
이것이 없으면 최후의 5%에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해석이 아주 모호한 상황에서 이것이다 하고 판정할 수 있는 힘은 직관력이다. 역사도 결국 자료가 아니라 그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 내느냐서 좌우되지만, 사주도 마찬가지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중에서
*,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의 사주
양 력: 1903년 12월 13일 22:09
음/평: 1903년 10월 25일 22:09 남자
시 일 월 년
丁 乙 甲 癸
亥 亥 子 卯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대운: 역행
卯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81 71 61 51 41 31 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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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이 子寒月에 水氣가 太旺하여 丁用이다. 天門 亥 2개가 日時에 있음은 굉장한 예지력을 의미한다. 局勢가 寒하고 水가 청량하여 淸貧한 사주이다. 자미두수로도 子宮 수징계악격이니 더욱 그러하다. 박도사란 명칭를 들어가면 그렇게 명성이 자자 했는데도 평생에 집한칸 마련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인격이 청렴하고 바르셔서 아직도 고매한 인품이 칭송받고 있다. 火대운에 명성이 높아지고 생활도 많이 좋아지셨을 것이다. 乙卯대운으로 들어가면 다시 濕木이라 火식상用(목숨줄)이 힘을 잃고 자미로도 대운이 불리해지니 이때가 終命運이다. 卯대운 90세에 돌아가셨다>.
*, 우리나라 명리역사상 처음으로 MBC TV방송에 " 명리학자 박재완 " 이란 타이틀로 역술가가 명리학자란 이름을 걸고 1시간짜리 TV방송이 되었는데 아마 이건 전무후무한 일이 아닌가 한다. 도계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일년전인 1991년 의 일이었다. 그 프로에서 도계 선생님의 분명히 하신 말씀이 있다.
" 운명은 작은건 인간의 노력으로 바꾸어도 큰건 못바꾼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큰건 못바꾼다는건 인생의 큰줄거리는 못바꾼다는 뜻이다. 90세를 사시고 60 여년을 실제감명을 하시분의 오랜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다,. 요즘 개운 어쩌고 하면서 부적 사고 푸닥거리 하는것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은것이다.
그리고 그즈음 도계선생의 마지막 저서인 주역서를 출간했는데 출판기념식날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정,재계,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많이 참석해서 그자리를 빛내주었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명리역사상 아마 기념비적인 사건이 아닌가 한다. 일개 역술인이 당당히 명리학자 대우를 받으면 각계각층의 축하를 받았던 것이다.
*, 근, 현대 우리나라 명리학의 비조를 꼽으라면 구한말에 살았다는 전백인(全白人)이라는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전백인(全白人), 말 그대로 온몸이 흰 사람이라는 뜻으로 본명은 재학. 아호를 白蛇(흰뱀)라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몸의 특징으로 인해 약재로 쓰려고 왕실로 잡혀 왔다가 눈동자가 까맣다는 이유로 풀려났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삼각산 밑으로 숨어들어가 명리학을 익혔는데 한 공부 한 다음 대륙으로 가서 군벌들의 사주를 풀어줬다고 한다. 조선 총독의 일(전쟁터로 나간 사위의 생사)을 감정하여 사주면허증을 발급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계 박재완은 대륙에서 전백인을 만나 명리를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독특한 감명방법. 즉 사주+황극수로 이를 배우는 후학들이 골치를 꽤나 썩혔다고 한다.
도계의 유명한 점사로는 풍표낙엽 차복전파(楓飄落葉 車覆全破)로 이는 박정희시절 중앙정보부장 을 지내던 김재규의 1979년 운세였는데, 직역하면 “단풍이 낙엽이 되는 시절에 차가 엎어져 전부 파손된다.”는 뜻이다. 김재규는 그래서 차를 아주 조심했다. 자동차를 탈 때마다 운전기사에게 조심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곤 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인생을 놓고 볼 때 ‘차복전파’에 대한 해석은 잘못되었다. 車는 자동차가 아닌 차지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全은 전두환 前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김재규가 미리 알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것이 10.26의 예언격이 되어버릴 줄이
- 박재완 납치한 12·12 신군부 주체들 -
12·12라는 긴박한 역사의 수레바퀴 한쪽에서 벌어졌던 이 은밀한 일화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그 계기는 바로 ‘만세력’(萬歲曆) 때문이었다. 사주팔자를 보려면 반드시 ‘만세력’이라고 하는 달력이 필요하다. 만세력은 생년·월·일·시를 육십갑자로 표시한 달력이다.
일명 ‘염라대왕의 장부책’이다. 염라대왕의 장부를 보지 않으면 운명을 알 수 없다. 만세력이 없으면 사주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필수품은 신용카드이지만, 도사의 필수품은 만세력이다. 신용카드는 놓고 가더라도 만세력은 반드시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도사는 주머니에 만세력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자기 앞날의 운명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재적인 고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2월14일의 박재완은 만세력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군인들이 대전의 집으로 들이닥쳐 순식간에 납치했으니 미처 만세력을 챙길 심리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박재완은 서울에 도착하자 종로에 사는 제자인 유충엽에게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서울에 있네. 급히 오느라 만세력을 안 가지고 왔는데, 자네 만세력 좀 보내주게.”
“그러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글쎄…. 여기가 어디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사람을 그곳으로 보내겠네.”
이 전화가 끝나고 15분 정도 지났을 때쯤 건장한 청년 몇몇이 검은 안경을 쓰고 ‘역문관’에 나타나 제자 유충엽으로부터 만세력을 받아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만세력 일화는 그때 스승인 도계 박재완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고 만세력을 전해준 유충엽씨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97년 월간시사지 ‘WIN’(월간중앙의 전신)에 ‘역문관 야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유충엽씨는 역술인으로는 드물게 해방 이후(1949년) 대전사범을 나온 인텔리다. 대전사범이라도 나왔으니 이 일화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글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잉크방울은 핏방울보다 진하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 전국의 명산대찰 순례하며 도력 쌓은 도계 선생 -
그렇다면 도계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어떠한 수련 과정을 거쳤을까 궁금해진다.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보자. 도계는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0세 전에는 곽면우(郭傘宇) 선생 문하에 입문해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곽면우, 그는 구한말 영남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3·1운동 이후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는 유학자요,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도학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 인물이다.
소설 ‘단’(丹)을 보면 그는 정신수련에서 상당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인물로 묘사된다.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는 평소 곽면우 선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인 박의산(朴懿山:1926~) 선생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이환조 선생이 나오고, 이환조의 스승이 정봉강이고, 정봉강 선생의 사부가 바로 곽면우 선생이 되기 때문이다. 풍수 계보 상으로 따져 보면 곽면우 선생은 필자의 고조부 뻘이 된다.
곽면우의 풍수 수제자인 정봉강도 일본 경찰을 때려 죽이고 전국으로 유랑하였듯 도계도 곽면우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단체 내부의 파벌싸움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명리학에 입문하게 된다
당시 이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중국 무송현의 왕보(王甫) 선생 문하에서 태을수(太乙數)·황극수(皇極數) 그리고 명리를 사사 받는다. 대가 밑에서 이론 공부와 함께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귀한 서적들을 이 시기에 입수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인연도 팔자소관이다. 여기까지가 이론 공부였다면 중국에서 귀국하여 1928년 26세 때는 금강산 돈도암(頓道庵)을 비롯한 여러 명산대찰에서 수도를 한다. 정신세계의 깊은 곳으로 침잠(沈潛)하는 수련의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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