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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기문 UN 사무총장 비하인드 스토리

심산멘토 2016. 6. 1. 00:42

 

반기문 UN 사무총장 비하인드 스토리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이 세계의 청소년에게 전하는 꿈과 희망의 메시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50여 년 전, '외교관'이라는 꿈을 품고 있던 한 소년이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유엔사무총장이 된 과정을 사진과 함께 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희망과 자부심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교육은 경쟁 의식만을 독려하고 있다. 공부의 목적을 탐구에 두지 않는 뒤틀린 교육 현실에서 청소년은 꿈과 열정, 그리고 도전 정신을 말살당한 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만 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또한 격변의 시대를 겪어오면서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라갈 만한 어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청소년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책은 이처럼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실력과 인품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은 반기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50여 년 전, 영어 학습 환경이 척박함에도 영어 공부에 열정을 보인 반기문의 공부 이야기는 영어 등을 공부하는 데 원동력을 주며,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아울러 크든 작든 상관 없이 꿈을 품을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반기문의 삶을 들려줌으로써, 청소년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가도록 격려해준다.

 

 

 

 

 

제1부 ― 인생은 꿈을 따라 흐른다

 


 

1 공부라는 놈을 믿고 마음을 줘라

 

 

 

 

1944년 6월 13일, 반기문은 아버지 반명환과 어머니 신현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충북 음성 행치마을은 그의 아버지의 고향마을로서 훗날 풍수 전문가들은 이곳의 지기(地氣)가 온유한 성격의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하는 형상이라고 했다. 기문은 아버지를 따라 3세 때 청주로, 초등학생이었던 8세 때는 충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충주에서는 마침 친척 분이 교편을 잡고 있었고, 기문은 그에 따라 충주 교현 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기문은 공부를 잘했고 성격이 유순했기에 전학 생활에 곧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촌놈이라며 놀리던 학급 아이들도 진지한 태도로 공부를 즐기는 그의 모습에 곧 그를 놀리기보다는 오히려 ‘반 선생’이라며 따르기 시작했고, 선생님들도 이런 그를 귀여워했다.

 


 

기문은 다른 것에는 욕심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공부에서만은 달랐다. 그는 종종 친구들과 계산 시합, 외우기 내기, 주산실력 내기 등을 걸곤 했다. 그러나 이는 경쟁심이나 승부욕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자신의 수준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그런 순수한 욕심이었다. 기문에게 공부는,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고, 친구들과 종종 벌이는 공부 내기는 하나의 게임이었다.

 

 

 

 

재미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겨울밤, 변소를 다녀오다 잠이 깨면 기문은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책을 읽었다. 불 좀 끄라고 투덜대는 동생들을 다독여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주면 동생들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책을 읽곤 했다. 고요한 밤, 그렇게 책을 읽노라면 “그래, 이거구나!”하며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고, 집중력도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57년 3월, 기문은 충주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중학생이 되어 새로 배우게 된 영어는 단숨에 기문을 사로잡았다. ‘그래, 이게 미국 사람들 말이구나. 이걸 배우면 미국 사람들과 말을 할 수 있겠네.’ 꼬부랑 글자들이 영 구별이 가지 않아 처음엔 걱정이 되었지만 집에 돌아와 스무 번씩 쓰는 숙제를 끝내고 나니 덜 헷갈리면서 이내 내일 수업부터는 큰 지장 없겠다는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기문은 공부라면 언제나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노래 솜씨나 그림 솜씨는 가지고 태어나는 소질이라는 게 필요한데, 공부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있는 머리에 조금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이 좋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우선은 평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어든 본문이든 배운 것을 무조건 스무 번씩 쓰는 숙제는 기문에게 영어 문장을 통째로 외우게 함으로써 매우 효과적인 학습법이 되었고 한 번 재미를 붙인 기문의 영어 실력은 날로 발전해갔다.

 


 

기문은 1960년 충주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영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영어로 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고 외우고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은 ‘영어에 미쳤어’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루는 기문의 실력을 눈여겨본 영어선생님이 그를 불러, 교과서 내용을 가지고 영어 리스닝 교재를 만들어 보자며 녹음기를 내주셨다.

 

 

 

 

녹음기를 받아들고 고민 끝에, 기문은 충주 비료공장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료공장이었던 그곳에는 당시 기술 전수를 위해 미국인 기술자들이 몇몇 와 있었다. 콩글리시가 아닌 정확한 발음으로 교과서를 녹음할 생각으로 기문은 녹음기를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갔다.

 

 

 

 

용기를 내어 몇 차례 말을 붙여 본 끝에 한 미국인 부인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1차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외국인과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기문은 놀랍고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의 영어공부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후로도 기문은 그 미국인 부인의 도움을 받아 계속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먼 길에도 꼬박꼬박 찾아오고 한 마디라도 더 해 보려는 그의 성실함에 감명받은 부인이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이웃 부인들에게까지 그를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또한 기문은 근처 성당에 미국인 신부가 부임하자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 그가 귀찮아할 정도로 쫓아다니며 말을 걸곤 했다. 친구들의 말대로 그는 ‘영어에 미쳤었다.’ 앞으로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 성공 요소가 될는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때였지만, 단지 영어가 재미있었고 뭔가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해 줄 것 같다는 작은 기대가 있었다.

 

 

 

기문은 영어에는 탁월했지만 음악과 운동 등 예체능 과목은 젬병이었다. 노래도 못하고, 당시 유행이었던 통기타도, 축구도, 농구도 못했다. 기문에게 잘하는 것은 오로지 영어였고, 그러다 보니 승부근성이 붙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영어에 푹 빠져 있는 기문에게 더 큰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김성태 영어선생님이었다. 고2때 만난 김성태 선생님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서울의 명문대 출신으로 열성이 넘치는 교사였다.

 

 

 

그는 기문을 알아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이러한 선생님의 인정과 격려는 자신의 객관적 실력을 몰라 답답해했던 기문에게 큰 힘이 되어 이후 기문은 공부의 방향을 잡고 매 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게 되었다.

 

 

 

한 김성태 선생님은 우등생들을 모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켰는데, 정지영, 허문영 등 이때 만난 우수한 친구들은 기문에게 좋은 자극과 도움이 되었으며 어른이 되어서까지 깊은 인연을 유지하였다.

 


 

그의 공부법에 남다른 점이 있다면, 공부에 온통 마음을 줘버렸다는 것이다. 출세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부에 진심을 주었고 공부는 그의 진심을 배반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성적표가 항상 좋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2 꿈도 물을 줘야 자란다

 

 

 

 

김성태 선생님이 우등생들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국가에 봉사해야 할 엘리트들은 사회와 인류를 위한 봉사 마인드를 길러야 한다는 그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기문 역시 이 활동으로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고, 이는 후에 그가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필요한 소양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기문을 불렀다.

 

 

 

 

“기문아, 나는 네가 외교관이 되면 참 좋을 것 같구나. 넌 영어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다투지 않는 성품에다 매너도 참 좋은 아이거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진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외교관이라니…….” 쑥스러웠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초등학교 시절 당시 3대 외무부 장관이었던 변영태 장관이 학교에 방문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비록 그날 장관은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외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신기했고, 그 이후 기문은 종종 ‘나도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주변에 말해오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국제적인 일을 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1956년 10월 23일, 소련의 지배 하에 있던 헝가리에서 공산당 독재에 반대하는 국민 봉기가 일어나자 흐루시초프가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를 침공, 무려 2,500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기문은 헝가리 혁명이나 유엔 등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남의 나라에 탱크를 몰고 들어와 국민들을 죽이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고, 이에 탄원서를 작성하여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 2006년 그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어 수락연설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자 헝가리 정부에서는 ‘헝가리 자유의 메달’을 그에게 수여하였다는 점이다. 한 초등학생의 작은 행동이 50년 뒤 훈장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외교관의 꿈이 익어갈 무렵, 그에게 기회가 생겼다. 적십자사에서 청소년 미국 연수 프로그램인 비스타(VISTA, 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대상자를 선발한다는 공문이 각 지방 교육청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김성태 선생님은 적극적으로 기문을 독려하였고, 이에 힘을 얻은 기문은 당시 입시를 앞두고 있던 고3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경쟁에 참여하여 쟁쟁하다는 서울 학생들과 영어실력을 겨루어 보기로 하였다.

 

 

 

 

당시 충주에서 미국에 가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그때 미국에 간다는 것은 오늘날 우주여행을 한다는 것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더욱이 기문은 서울에조차 가 본 적이 없었다. 대회 준비를 하면서 짐짓 걱정이 되었지만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기로 했다.

 

 

“그래,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으니 끝까지 가 보는 거야. 결과가 안 좋더라도 서울 아이들이 얼마나 센지 이 참에 한번 알아보는 거지 뭐. 아참! 그러고 보니 못해도 서울 구경이네.”

 


 

날짜가 지났는데도 합격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애를 태우던 교장선생님은 서울로 직접 찾아갔다. 기문이 큰 점수 차로 1등을 했는데도 담당 기관에서 연줄을 앞세운 다른 학생을 선발하려고 하는 것을 알게되자 선생님은 민원을 제기했고, 이런저런 노력 끝에 결국 기문은 다른 남학생 한 명, 여학생 두 명과 함께 비스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기문이 선발되었다는, 소식은 충주고는 물론 충주 전체의 경사였다. ‘충청도 촌놈이 공부 잘해 미국 간다’는 것에 온 충주가 들썩였다. 충주고 인근 충주여고에서는 기문이 미국인들에게 전달할 선물로 학생들이 직접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청소년적십자단 활동을 같이 했던 충주여고의 유순택이 대표로 이를 그에게 전달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에 평소 그녀를 마음에 두었던 기문의 얼굴은 달아올랐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라는 말을 하고 싶었건만 입밖에 나온 건 ‘고맙다’라는 말뿐이었다. 학교에서는 미국에서 촌스럽게 보이면 안 된다며 기문에게 머리를 기를 수 있는 특혜를 주었고, 부모님께서는 어려운 형편에 용돈까지 마련해 쥐어 주시며 출국하는 날 생업을 접고 김포공항에 함께 나가 환송해 주셨다.

 


 

1962년 고3 여름방학 때 떠난 비스타 프로그램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청소년적십자단 활동은 물론 예술제, 봉사, 연수 등의 일정으로 43개국 117명의 대표 학생들이 참여했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칠레나 유고슬라비아 등 작은 나라 학생들도 있었다. 홈스테이를 하며 기문은 미국인들의 생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한편 그들에게 우리나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려 주려고 애썼다.

 

 

 

 

가장 뜻깊었던 경험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던 일이었다. 백악관 견학 후 등장한 케네디 대통령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에 그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케네디 대통령은 2~3분간의 연설을 마치고 기문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외교관입니다.” 기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무언가 선명한 것이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래, 내 꿈은 외교관이야.’ 그는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19세 반기문에게 꿈의 설계도가 제대로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이후 잠시 멍한 기분이었지만 기문은 곧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의사가 되었으면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기문의 뜻을 인정해 주셨고, 1963년 기문은 서울대 외교학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시골 학교를 다녔던 반기문이 김성태 선생님과 같은 열의 있는 영어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또 열아홉에 미국에 가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거기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꿈은 씨앗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기문은 자신의 꿈에 물을 줄, 이 모든 사람을 만나 꿈의 줄기와 잎을 생생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 꿈도 물을 줘야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3 결핍이 없이는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배울 수 없다

 

 

 

기문의 집안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형편이 좋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집안 형편이 기울기 시작했다. 기문이 중3때, 충주에서 한 동네 살던 김씨가 찾아와 1년을 얹혀 살더니, 서울에 좋은 사업이 있다며 기문의 아버지를 꼬드겨 돈을 타낸 후 종적을 감춘 것이다.

 

 

 

 

이제 빚진 돈을 갚기 위해 어머니까지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이런 마당에 장남인 기문은 앉아서 공부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기문은 집이 가난해졌다고 해서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동생들과 함께 집안 청소나 장작패기 등 허드렛일을 했고, 틈틈이 짬을 내어 돼지를 길렀다.

 

 

 

 

돼지 기르기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지만 돼지의 똥은 좋은 비료가 되기 때문에 이웃집에 날라다 주고 대신 옥수수 등 먹을거리를 얻어 와 살림에 보탤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문이 미국 연수생으로 선발되었다고 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

 

 

기문의 부모님이나 기문이나 자랑이라고는 통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에 그 이야기를 듣고 “누구? 그 돼지 똥 지고 다니는 반 씨네 장남?”이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기문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부를 해야 동생들도 보고 따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안일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학급 반장으로서 학교의 잡일도 많았다. 이에 기문은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그러면서 10여 분의 자투리 시간 활용이 굉장한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했다.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시간 관리를 잘한다는 차원을 넘어, 매순간 어떤 일이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태도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며 사는 사람.’ 이것이 그의 식구들이나 지인들의 그에 대한 평가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동생들도 영향을 받아, 모두들 은행지점장, 교사, 약사 등 자신의 꿈을 성취하였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다. 보통 대학 신입생 때는 공부는 뒷전이건만 기문은 여전히 학구열에 불타 좋아하는 공부를 실컷 하였다. 또한 그렇게 사귀고 싶어 하던 유순택이 중앙대학교 도서관학과에 입학하였고, 이에 그녀와의 첫사랑도 시작되었다.

 

 

 

기문을 보면서 ‘참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해오던 순택은 그의 진실한 태도에 마음을 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주과외를 시작하였는데, 잘 가르치고 성실하고 사람 좋다는 평을 들으며 금세 최고로 인기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그가 아이들을 잘 가르쳤던 것은 그의 특별한 비법 덕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완벽한 필기 능력이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지만 머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언제나 꼼꼼하게 필기하면서 배운 것을 정리했다. 꼼꼼히 받아 적는 데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는데, 이러한 자질은 외교관이 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외교 현장에서는 사소한 표현 하나에 국익이 좌우되고 말 한마디에 어이없는 협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외교관은 모든 단어의 표현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MP3 녹음기가 흔한 지금도 국제협상에서는 받아쓰기가 기본이며 외교관 스스로 이를 소화해야 한다. 외교관이 된 후 이러한 반기문의 능력은 그대로 발휘되어 그가 들어간 회의의 기록은 그대로 외교부 보고서로 올라갔다.

 

 

 

 

민감한 사안의 경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옮기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의 실력은 외교부에서도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려면 필기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듯 작아 보이는 모든 것에 충실할 때 성공은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학 2학년을 마친 후 반기문은 군대에 갔고, 거기서도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장군의 영어 개인교사로 차출되어 복무를 하였다. 제대를 하고 나니 외무고시 제도가 시작되었다. 1968년 복학해 3~4학년을 다니며 본격적으로 준비, 1970년 졸업과 동시에 단 11명만을 뽑는 치열한 시험이었던 외무고시 3기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항상 1등만 하던 사람이 2등을 하게 되어 자극을 받았던 것일까, 이후 그는 외교부 연수에서 최선을 다하여 결국 1등의 성적으로 연수를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 드디어 유순택과 결혼을 했다. 혼수는 달랑 이불과 요강만 들고, 흑석동에 15만 원을 주고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연수를 마친 후 반기문은 해외 근무지로 인도를 지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해외근무 1순위는 미국이었고, 당시 인도는 그야말로 오지였다. 1등으로 연수를 마쳤던 반기문이 인도를 지원하자 주변 사람들은 그야말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물가가 비싼 미국에 가면 부모님과 동생들을 도울 수가 없었기에 영어권 나라 중 생활비가 아주 싼 인도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그는 별로 속상해하지 않았다.

 

 

‘다음 번에 기회가 있을 거다. 최선을 다해 생활하다 보면 그런 기회가 생길 거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가 어른이 되어 차관, 장관을 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제2부 ― 인생은 꿈을 따라 흐른다

 

 


 

4 최후의 승리는 결국 선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인도에서 반기문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멘토를 만나게 된다. 바로 당시 인도 총영사였던 노신영이다. 노신영은 인도 총영사를 거쳐 1980년대에 제18대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배짱 외교’로 유명한 인물이다. 힘든 일, 허드렛일도 마다 않는 반기문의 성실한 자세는 곧 노신영의 눈에 띄었다.

 

 

 

 

노신영은 반기문에게 외교관으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 등 훌륭한 외교관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 주었고, 반기문은 대선배의 가르침을 잘 따랐다. 노신영도 항상 그를 옆에 두려고 하여, 초대 인도 대사로 취임하거나 방글라데시와 국교를 수립할 때 등 어디에나 그를 데리고 다녔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열정에 넘치는 반기문을 노신영이 알아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의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을 만날 수 없었으리라.

 


 

반기문의 솔선수범하고 성실한 태도 및 선후배 동료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성품은 그를 초고속 승진의 길로 이끌었다. 이범석 제19대 외교통상부 장관은 반기문을 곁에 두기 위해 서기관이었던 그를 선배들에 앞서 부이사관으로 승진시켰고, 이어 노신영은 1985년 제18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그를 2급 이사관급인 자신의 의전비서관으로 진급시키고자 했다.

 

 

 

 

반기문은 외무고시 1, 2기 선배 모두를 제친 너무 빠른 진급이 부담스러워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승진이 되었고, 이에 그는 꼬박 일주일을 걸려 선배와 동료 외교관 100여 명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선배들보다 먼저 승진하게 돼서 미안하고 송구하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그의 인격을 아는 선배들은 그의 편지를 받고 오히려 그의 빠른 성장을 격려해 주게 되었다.

 


 

이상옥 제23대 외교부 장관도 반기문을 주미 공사로 부임시킨 뒤 일주일 만에 1급으로 승진시켰고, 공로명 제25대 장관 역시 그를 1996년 1월에 외교부 제1차관보, 2월에 차관급인 대통령 의전 수석비서관으로 승진시켰으며, 그 해 11월 유종하 제26대 장관은 그를 차관급인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였다. 1년 동안 3차례나 승진한 것이다.

 

 

 

 

그는 외교부 초고속 승진의 전설이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시기나 질투보다는 응원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그의 인품과 상하 좌우로 모든 사람들을 조화롭게 이끄는 그의 능력 그리고 일과 자기관리에 엄격하되 후배 직원들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그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그는 또한 공직자로서 철저히 도덕적인 삶을 견지했다. 근본적으로 욕심이 없고 검소하기도 했지만 자기 원칙을 세워 철저하게 지켰다. 30여 년 동안 전셋집을 전전하고 차관 시절에조차 흑석동 산동네에 전세를 살았을 정도였다. 2000년에야 사당동에 아파트 한 채를 분양 받고 “드디어 내 아파트가 생겼구나”하고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했을 때는 공관에 전화를 한 대 더 설치하여 개인 용무로 사용한 전화 요금은 자신의 비용으로 지불하는 등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사소한 부분까지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또한 자식들 결혼식도 마치 비밀작전하듯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첫 딸이 결혼하였을 때, 비서관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하고 홀로 식장을 찾아 주변에서 장관 딸 결혼식 맞느냐고 수군거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유엔 사무총장 당선 후에도 장관 판공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식사대접을 화려한 호텔이 아닌 장관 공관에서 치렀고 그나마 가족, 친지, 친구 등 사적 관계로 인한 연회 비용은 전부 개인 비용으로 처리하였다. 이렇듯 철저한 자기 원칙이 오랜 시간 부정부패에 흔들리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삶을 살아올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또한 주변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항상 편지에 자필로 답장을 하는 등 성의를 표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비결은 ‘정성’뿐이라는 노신영 총리에게 배운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방청소를 하는 아주머니, 운전기사, 외교부 출입기자, 외교부 직원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는 그의 사람됨에 있다.

 

 

 

 

2001년 외교부 차관직에 있을 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갑작스레 퇴진하게 되었다. 마침 그날, 공교롭게도 그는 부하 여직원의 주례를 서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주례를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직원과 가족이 내가 식장에 안 나타날까봐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에 그는 오히려 결혼식장에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 신부의 부모를 안심시키고 복잡한 마음에도 무사히 주례를 마쳤다.

 

 

이렇듯 겉치레가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한 결과 그의 사무총장 당선에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한 것이다. 선한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마음 뿌듯한 일이다.

 

 


 

5 열정만 있다면 부족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다

 

 

 

 

1979년, 반기문이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할 때였다. 비록 영어가 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지만, 유엔 본부에서는 영어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외교란 친구를 사귀는 것인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말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외교관에게 프랑스어는 매우 중요한 언어다. 시제와 동사 변화가 다양하여 그 어떤 언어보다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상황 묘사를 할 수 있기에 중요한 외교문서의 경우 프랑스어로 작성하는 것이 많다. 이에 반기문은 바쁜 와중에 하루 몇 십 분씩 꾸준히 공부해 결국 유엔의 프랑스어 프로그램 최상급 자격증을 땄다.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지만, 이렇게 쌓은 프랑스어 실력은 훗날 그가 유엔 사무총장 후보에 나섰을 때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은 프랑스의 지지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반기문이 모든 외국어를 원래 잘하거나 외국어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열정, 그것이 언제나 그의 동력이었다.

 


 

유엔 본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했던 1983년, 미국 유학의 기회가 생겼고 그는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선택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수많은 미국 고위 관료들을 배출했던 그곳의 수업은 따라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자지 않는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전과목 A+를 받았고 졸업식에서 학교 설립자상을 받았다. 힘들었지만 원 없이 공부했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부족한 것을 채우겠다는 그의 열정은 외국어뿐만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대사 시절, 오스트리아 빈은 모차르트의 도시답게 각종 댄스 파티와 공연이 많았다. 비록 몸치이자 음악엔 문외한이었던 그였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의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로 춤을 배웠다. 또한 중요 오페라 공연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예술에의 안목을 키워나가며 예술을 사랑하는 외교관, ‘진짜 신사’의 이미지를 쌓아 갔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부족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워 넣겠다는 열정,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직급이 올라가서도 반기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해외 출장을 다닐 때는 반드시 일정에 무박을 넣어 시간과 숙박비를 아꼈고, 비행기 안에서도 끊임없이 일정과 업무를 점검했다. 2000년 외교통상부 차관 시절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해 일한 것으로 유명하며,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재직한 2년 10개월 동안에 방문한 국가는 모두 111개국이나 된다.

 

 

 

 

해외 출장 357일, 외교장관 회담만 374회로, 이것은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으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픔도 없지 않았다. 1991년 12월 미주 국장으로 판문점에서 열린 북한과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을 진행할 때였다. 협상이 한창이던 시점, 보좌관 한 사람이 그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바로 협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했다. 이를 악물었다. 몇 시간 후, 협상이 끝나고 아버지의 빈소가 있는 충주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다. ‘쾅’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부음 소식에도 바로 달려갈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가 그때만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렇듯 열정적으로 일한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1년 2월 외교부 차관직을 맡고 있을 때,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의 정상 회담 결의 공동성명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 정부가 탄도탄 요격 미사일(ABM) 조약을 지지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미국의 전미 미사일 방어체제(NMD)와는 대치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고, 이에 미국 측에서 우리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미국에 등을 돌렸다며 우리나라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을 지고 반기문이 퇴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4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승수 외무부 장관으로부터 유엔 총회 의장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차관에서 국장으로 낮춰가는 자리였지만 반기문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의 뒷말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때 그가 다른 사람의 눈에 초라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 유엔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겨울과 같은 위기와 시련이 오게 마련이다.

 

 

그리고 겨울나무가 새 봄을 위해 자신의 잎을 떨구어 내듯이, 앙상해 보이는 것을 두려워 말고 도전해야 이듬해 봄날 눈부신 푸른 잎을 새로 틔울 수 있는 것이다.

 


 

6 계산하지 않은 진심이 큰 행운을 몰고 온다

 

 

 

 

유엔 총회 의장 비서실장으로 다시 시작한 반기문은 대단한 열정으로 일했다. 차관까지 지낸 덕분에 넓은 인맥으로 영향력이 커 일의 효율성과 추진력이 좋았다. 그는 곧 유엔 사무국에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유엔에서 난제였던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반목도 일일이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해결해냈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등 소외된 지역의 대표와도 자주 만나 수시로 격려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적이 없는 ‘진짜 외교관’으로 통했으며, 이러한 모든 인연은 나중에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2005년부터 외교가에는 차기 유엔 사무총장을 우리나라에서 내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정부도 이에 적극적이었다. 정부에서는 30여 년간의 외교관 생활과 유엔 실무경험으로 국제사회에서 입지가 탄탄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을 공식 후보로 선정했고, 기자들에게는 5개월간의 엠바고를 요청했다.

 

 

 

 

언론 공표 전에 신중하게 사전 선거운동을 하자는 치밀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2006년 2월 14일, 드디어 엠바고가 종료되었고 반기문은 카메라 앞에 서 출사표를 낭독했다. 정부는 북한에도 이를 알렸고, 국회에도 찾아가 지원을 당부하여 초당적인 지지를 약속 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었고, 반기문은 초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내며 투표권이 있는 15개 국가뿐만 아니라 유엔 소속국 전체를 대상으로 전방위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2006년 7월,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제1차 예비투표에서 반기문은 찬성 13표, 반대 1표, 기권 1표로 인도의 샤시 타루르 후보를 2표 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워낙 엄청난 자리라서 해외는 물론 국내 언론조차 그를 주목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그제야 언론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새로운 다른 후보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9월에 실시한 제2차, 제3차 투표에서 그는 굳건히 1위를 지켰고, 우리 정부에서는 사무총장 선거에 총력을 쏟기 위해 2007년 예정이었던 비상임이사국 진출까지 연기했다. 마침내 10월 3일, 제4차 투표가 치러졌고, 찬성 14표, 기권 1표, 그리고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없는 압도적인 득표 결과가 나왔다. 다른 후보들이 사퇴를 선언하고 반기문 지지를 발표했다. 승리였다.

 

 

 

 

반기문은 드디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이다. 그는 감격적인 목소리로 소감을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신뢰와 지지에 크게 감사하고 개인적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유엔 개혁문제를 포함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인권보호에 많은 기여를 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 큰 책임을 느낍니다. 변함 없는 지지를 보내주신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사실 그의 도전은 성공 가능성이 높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를 도왔다. 크고 작은 인연들이 그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역시 그녀와의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반기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여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 주었다

 

.

 

 

 

반기문이라는 인물이 이토록 큰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은 작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상대가 누구든 배려하려 애쓰는 그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산하지 않고 진심으로 베푼 모든 선한 행동은 세상을 한 바퀴 돌아 자신에게 큰 행운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그는 교과서처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문재인 전 더민주당 대표,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손학규 더민주당

 

상임 고문 등 2017년 12월 19일 대선 유력 후보자 사주 분석을 바탕으로 차기

 

대선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분석중에 있으며 추후 블로그와 카페에 게재합니다​

 

 

 

출처 : 심산 진로 오행 컨설팅
글쓴이 : 심산멘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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