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런트 김수미 체험담
“사업까지 포기하고 지켜준 남편이 없었으면 지금쯤 중이 되었을 것이다”
영원한 일용이 엄마 김수미가 너무도 솔직한 고백에세이 ‘나는 그 해 봄 중이 되고 싶었다’를 펴냈다. 남편의 외도와 시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자신도 믿을 수 없었던 신비로운 빙의 체험과 자살기도까지, 폭풍과도 같았던 지난 삶을 반추하며 그녀가 써내려간 너무도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빙의로 가정이 풍비박산 일보직전까지 갔던 신비한 체험
이 이야기는 너무나 신비로워 나 자신도 믿을 수 없기에 아꼈다가 이제야 고백한다. 가족들과 ‘전원일기’ 출연자들은 지난 2년 동안 내가 미쳐 있었다고 한다. 방송가에선 나에 관한 소문들이 끊이지 않고 떠돌아 다녔다. 알코올 중독이다, 중풍이다, 미쳤다…. 남편은 자신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부탁했다.
“맞다. 가끔씩 미친다. 두 달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여러 가지 검사를 다 받아봤지만 의학적으로는 밝혀낸 게 없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들이 있고, 이제 스물세 살이 된 딸 아이도 있다. 김수미가 미쳤다는 기사가 나가면 신문이 조금 더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기자들은 나에 관한 기사를 일절 쓰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한동안 미쳐 있었다. 빙의! 한자어대로 풀이하자면 안절부절 못 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뜻이다. 불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사용하는 말이다.
‘익사나 살해나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억울하게 죽은 혼백이 유주무주(有住無住) 고혼이 되어 갈 곳을 찾지 못하면 머물기에 적당한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내어 미혹하고 싸늘한 영체를 그곳에 숨기게 되는데 그로 인해 영체가 들어간 곳은 흉기가 되고, 영체가 들어간 사람은 빙의가 된다.’
시어머니의 죽음으로 찾아온 빙의
카톨릭 신자인 내가 이런 믿기지 않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은 시어머니의 죽음 직후였다. 시어머니는 4년 전 내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가 식사를 하시면 아침밥을 먹지 않는 나는 그 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동무가 되어드리곤 했다. 시어머니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인텔리로 친정도 매우 윤택하고 일본여자처럼 예의도 발랐다. 내 남편을 유복자로 키우면서 사업을 시작하셨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는 여행으로 소일하며 편안하게 지내셨다.
그날 아침에도 시어머니는 냄비 바닥에 신 김치를 깔고 지진 고등어가 너무 맛있어서 다이어트를 하려 해도 너 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하시며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셨다. 사흘 후면 내가 직접 각본을 쓴 모노드라마가 공연될 예정이었기에, 아는 분들께 나눠주어야겠다며 포스터 몇 장을 들고 나가셨다.
어머니가 나가고 10분이나 지났을까.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데 가슴이 뛰고 이상하게 불안했다. 전화 벨소리의 주인공은 기사 아저씨였다. 길 건너 주유소에 있는데 빨리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뛰어나갔다.
경찰차를 지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보니 어머니 머리에서 쏟아진 피가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울거나 기절을 하는 게 정상일 텐데, 어찌 된 게 눈물은커녕 그냥 소름이 끼치도록 차분해졌다. 급발진이 원인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후 사람들은 몹쓸 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시다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나를 위로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엔 너무 젊고 건강하셨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나는 내내 급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기가 막혔다. 어머니의 시신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고부간이었음에도 어머니와 나는 각별한 사이였다. 남편과 싸우고 내가 집을 나가버리면 어머니는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어멈이 다 옳아요. 유복자라고 아범을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하시며 며느리 화풀어지라고 내 방 꽃병에 꽃꽂이까지 해주셨다. 내가 공연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관객이 들지 않을까봐 다니던 교회며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가 수백 장의 티켓을 팔아주시기도 했다.
나에게 어머니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몇 개월이 흘러도 내 상태는 나아지질 않았다. 만사가 다 귀찮아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가서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드라마 섭외가 들어왔지만 ‘전원일기’도 빼달라고 해야 할 형편이었다.
심지어 주방으로 물 마시러 가는 것도 귀찮아 물병을 방에 옮겨다 놓고 침대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샤워를 하지 않았는지 머리를 긁으면 손톱 밑에 새까맣게 때가 끼었다. 그러나 나는 손톱에 낀 때를 이쑤시개로 파내면서도 머리는 감지 않았다.
먹는 것도 귀찮았다. 혼자 먹는 점심도 한정식집에서 먹을 때처럼 화려하게 차려놓고 먹던 나였지만 최대한 빨리 간편하게 먹기 위해 한 끼에 만두만 다섯 개씩 쪄달라고 해서 하루에 두 번 먹었다. 그렇게 먹기를 1년 4개월. 어느날 아줌마와 아이들은 만두를 먹는 내 모습을 지켜보다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내가 만두를 질질 흘리며 먹더라는 것. 이튿날도 그랬다지만 나는 내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남편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충격이 오래가는 것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내가 한 달째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다는 딸아이의 말에 나를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나흘에 걸쳐 모든 검사를 받아봐도 갑상선 외에는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신과에서도 갱년기 우울증일 뿐 그리 심각할 게 없다고 해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술을 달라는 나와 말리는 남편의 숨막히던 전쟁
별 이상이 없다는 의사 말에도 불구하고 내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 5시면 눈이 뜨이는데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고 떨리는지 오른손으로 가슴을 힘껏 쳐댔다. 빈속에 소주를 커피잔으로 한 잔 가득히 마시고 나서야 심장이 가라앉았다. 한 잔이 두 잔으로, 두 잔이 한 병으로, 한 병이 두 병으로 늘어나 어느 날은 비틀거리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피투성이가 된 나를 남편이 응급실로 데려가야만 했다.
‘전원일기’ 녹화 날 아침에도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프로듀서와 혜자언니, 고두심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결국은 내가 깨기를 기다리다 지쳐서 급히 대본을 수정해 ‘일용 엄니’를 빼고 녹화를 했다고 한다.
남편은 나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양주며 와인까지도 다 갖다 버렸다. ‘전원일기’ 녹화 후 집에 돌아오면 의상 가방을 뒤지고 몸수색까지 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돼 밖에 있을 때는 30분 간격으로 집에 전화를 걸어 내가 취했나, 안 취했나를 확인했다. 술이 없는 새벽에는 심장을 때리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해낸 게 스킨병에 소주를 담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스킨병 두 개에 소주를 채워 가지고 왔다가 남편에게 들통나는 바람에 결국 나는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병원은 이전과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즈음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니시리즈에 출연하기로 했다. 그러나 첫 야외촬영이 있던 날 차 안에서 소주 두 병을 마신 나는 결국 촬영을 하지 못하고 바로 한양대학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남편은 MBC 제작부장을 만나 나를 ‘전원일기’에서 빼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야외 촬영에서도 빼주고 대사도 줄이겠다는 말에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입원한 상태에서도 나는 촬영만 있으면 술을 마실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 어느 크리스마스에 가족들에게는 밤샘 녹화를 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방송국에서 소주 두 병을 마시고 분장실 옆 온돌방에서 잤다.
깨어보니 혜자 언니의 차 안인데 오줌을 얼마나 쌌는지 천으로 된 시트가 온통 젖어 있었다. 혜자언니의 사돈이 정신병원을 하는데 나를 밤 11시에 데리고 나오라고 했단다. 신경안정제와 술 끊는 약도 받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남편은 녹화 날에 아들을 딸려보내 화장실까지 따라다니게 했고 담배도 끊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병수발이 힘들었던지 결국 남편은 나를 퇴원시켰다. 한데 이번에는 언어 장애가 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목이 말랐다. 쉬지 않고 물을 마셨다. 그렇게 물을 마시니 내 속옷은 마를 날이 없었다. 한 달씩이나 갈아입지 않은 속옷이 노랗게 찌들어갔다.
이때 쯤 휴스턴에 있는 사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빠는 한국을 빛낸 10인에 뽑힐 만큼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유명한 의사다. 내 병세를 들은 오빠는 나를 진찰했던 의사들로부터 자료를 받아 분석해 그 결과를 팩스로 알려주었다. 오빠가 내린 병명은 ‘포제션(possession)’.
영혼이나 강력한 힘, 혹은 절대적인 신의 영향으로 새로운 인격이 나타나서 전혀 다른 사람이 행동을 하게 되는 질병으로, 그대로 두면 폐인이 되거나 자살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과학적인 치료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카톨릭 집안이니 기도나 열심히 하라고 했다.
사업도 팽개치고 보살핀 남편과 아이들의 눈물의 절규
1년 동안 나한테만 매달려 있느라 남편의 사업도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미국에 친척들이 많으니 아이들은 그리로 보내고 우리 부부는 언젠가 같이 여행했던 남태평양의 섬 팔라우로 떠나자고 했다. 사업이고 뭐고 다 정리하자고 했지만 이런 얘기도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남편은 시어머니 산소로 끌고 갔다. 남편은 어머님의 무덤에다 얼굴을 찧으며 울고 있었다.
“엄마, 수미가 미쳤어요. 엄마, 우리 명호랑 주리, 불쌍해서 어떡해요! 주리가 매일 울어 눈이 밤탱이처럼 부어서 학교도 안 가요. 엄마, 나도 당뇨 수치가 엉망이라 수미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요. 엄마, 나 죽으면 우리 수미 불쌍해서 어떡해요!”
남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남편이 벗어놓은 저고리 주머니에서 비어져 나온 담뱃갑을 빼내어 서너 개비를 훔쳤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장례식을 치르러 온 사람들이 보이기에 또 몇 개비를 빌렸다. 남편이 우는 사이 남의 무덤 앞에서 한 갑 분량의 담배를 다 피운 후 다시 시어머니의 무덤으로 돌아가는데 남편이 풀숲에 쓰러져 있었다. 잠시 후 남편은 일어나 앉았다.
“수미야, 우리 많이 즐기고 원없이 살았으니 같이 죽자. 강원도 쪽으로 가면 벼랑이 많으니 거기서 죽자. 다들 교통사고인 줄 알거야.”
나는 죽기 전에 원없이 담배를 피우게 해달라고 했다. 남편은 허허 웃더니 차에서 담배 한 갑을 가져다주면서 오늘부터는 마음대로 피우라고 했다. 내가 하는 짓이 지겨웠을 만도 한데 남편은 내 얼굴까지 닦아주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든 것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여러 자살 방법을 고민하다 권총 자살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총을 구할 수가 없었다. 목을 매달기로 했다. 가족들의 눈을 피해 아침에 목을 매기로 하고 보니 그때가 새벽 1시였다. 그때 문득 혜자언니 생각이 났다. 내 목소리를 듣고 혜자언니는 무척 반가워했다. 그때 내가 먼저 죽으면 내 무덤가에 나팔꽃씨나 뿌려달라고 했다.
언니는 나더러 5년만 기다려주면 서울 집 팔아서 시골에다 집을 지을 테니 버려진 아기들이랑 치매 노인들 같이 돌보자고 했다. 자살을 결행할 시간이 1분 1초 기다려지는데 눈치 빠른 언니는 나더러 5년을 기다리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목 메인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 외출할 줄 알았던 남편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코트 하나를 입혀서는 나를 기 치료해주는 곳으로 데려갔다.
2년 동안 고생한 병, 단 하루의 치료로 기적적으로 낫다
기 치료는 믿기지 않을 만큼 효험을 발휘했다. 치료를 받은 후 내장까지 깨끗해졌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나서 커피를 마실 요량에 “아줌마, 커피주세요” 했더니 아줌마가 “다시 한번 말해봐요” 그런다. 그래서 “왜 그래, 커피 달라니까.” 다시 얘기를 했더니 아줌마는 화들짝 놀라 나를 껴안았다.
“아이고 세상에, 이게 웬일이래요. 눈동자가 제대로 돌아왔네요.”
나는 아줌마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뿐만 아니라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아래를 내려다봤더니 세상에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베란다를 봤더니 내가 그토록 아끼던 화초들은 다 죽어 있었고, 부엌을 보니 냉장고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내 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줌마의 연락을 받고 남편과 아이들이 급히 돌아왔다. “말 좀 해봐, 어서!” 다짜고짜 말부터 하라는 남편의 말에 나는 그제야 내가 발음이 잘 안 됐었다는 게 생각났다. 갑자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류시화 시인의 ‘물안개’라는 시를 읊었다. 식구들은 감탄을 하면서도 좀더 빠르게 말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딸이 자주 듣는 노래에 나오는 랩을 내 맘대로 바꿔서 불렀다. 춤까지 추며 랩을 했더니 가족들은 탄성을 지르며 일제히 박수를 쳤다.
안방으로 달려들어간 남편은 엉엉 울었다. 아들은 대본을 가져다 주며 ‘일용 엄니’ 대사를 해보라고 했다. 딸아이도 방으로 뛰어들어가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전원일기’ 녹화장에 갔는데 혜자언니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수미야! 너 눈동자가 정상이야. 머리도 감았구나? 어떻게 된 거니?” 한다.
정확히 하루 만에 2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귀신딱지가 사라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혜자언니까지도 “너, 귀신 씌었었니?”한다. 정신이 돌아온 나는 목욕을 하고 대청소를 하고 시장에 가서 김칫거리를 사다가 김치를 담갔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서너 달 후부터 눈이 너무 아파왔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 방에 꽃을 꽂아주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들방에 있던 사진 속의 시어머니가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얼마나 귀신처럼 노려보는지 무서워서 액자를 창 밖으로 던져버렸다. 또 나를 미쳤다고 할까봐 아무에게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음 번에 2층 아들 방에 침대 시트를 갈아주려고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침대 벽에 걸린 시어머니 사진이 또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순간 사진으로부터 얼음장 같은 한기가 나오더니 내 얼굴에 닿았다. 금방이라도 나를 죽일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워 계단을 미끄럼 타듯 기어서 내려와야 했다. 나는 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 ‘빙의’를 쓰신 묘심화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찾아갔다.
묘심화 스님은 나를 보자 “눈에 빙의가 아직 안 빠졌네요”라고 하셨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시어머님 사진이 왜 나를 노려보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억울하게 죽은 혼령이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떠돌다가 가장 애착이 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붙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사주를 보시곤 너무 영적으로 맑고 천재적으로 머리가 좋아 귀신들은 이런 영혼에 들어가 놀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후 스님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한이 많은 영가(영혼)를 불러낸 뒤 달래서 보내는 퇴마의식이 있던 날, 스님께서는 나에게 평소 자주 입던 속옷을 하나 갖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만약 내 눈이 낫게 되면 스님을 스승으로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절에 갔다. 그 행사를 치르는 스님들은 박정희 대통령 영가천도를 주도했던 스님의 제자들이라고 했다.
퇴마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 우리 형제 셋, 시댁 식구들, 2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시누이 아들 이름까지 다 적었더니 전부 열다섯 개의 위패가 놓이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울기 시작한 나는 조카의 이름을 부르고 어머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집으로 달려가 나를 그토록 무섭게만 노려보던 어머님의 사진을 끌어안았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이미 웃고 계셨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부터는 눈이 아프지 않았다.
이번에 책을 내게 된 것은 이제 내가 다 나았다고 사람들에게 광고하려고 쓴 거나 마찬가지다. 원고를 다 쓰고 교정을 보는 동안 도대체 기가 무엇인지 궁금해 서점에 가서 30여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묘심화 스님의 ‘빙의’도 그중 하나다. 내 병명이 빙의였다는 사실을 알고 원고를 다시 쓰는 바람에 출판이 한 달이나 늦어졌다.
어쨌건 이번 책이 많이 팔려 방송 3사 PD들이 내가 완전히 다 나았다는 걸 알고 드라마 섭외를 해줬으면 좋겠다. 너무나 일이 하고 싶다. 그리고 나처럼 그 고통 속에서 지내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빙의의 전도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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